여러분 안녕 필규에요. 평소에 하던 인사와 약간 달라진 게 있는데 혹시 눈치를 채셨나요? 이번에는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 필규에요’라고 인사하지 않았잖아요? 이런이런 평소에 뉴스레터를 조금만 유심히 보았다면 금방 발견했을 차이였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여러분에게 볼멘소리를 할 생각은 없어요. 작년 말 새롭게 뉴스레터 개편안을 기획하며 저는 여러분이 이 뉴스레터를 세상 무엇보다 편하게 읽었으면 희망했거든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극장에서 영화를 기다리다 잠깐 뜨는 시간에 혹은 화장실에 앉아 있는 순간에. 크게 집중하지 않으면서 흘러가듯 말이에요. 그러니 인사말의 달라진 점을 몰랐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제 의도에 따라 메일을 잘 읽어주신 셈이에요. 미리 감사를 전합니다.
왜 인사말을 바꾸었냐고요?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알아챘을 거 같아서 김이 새긴 하지만 본론을 이야기 해야겠네요. 여러분이 이 메일을 읽을 때쯤이면 저는 더 이상 비온뒤무지개재단의 활동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에요. 짜잔! 놀랐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단조로운 하루에 제가 약간의 충격을 주는데 성공했군요. 아니라고 해도 조금은 놀라는 척을 해줘요. 이게 앨라이 뉴스레터를 통해 제가 여러분을 만나는 마지막 순간이 될 테니까요.
저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셔야 할 다른 이유도 있어요. 앨라이 뉴스레터의 개편 이후 저는 여러분에게 소박한 선물을 늘 전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 뉴스나 무작위로 뽑아서 여러분에게 전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뉴스 선택에 꽤나 공을 들였어요. 차별 때문에 위기에 처한 트랜스젠더 친구를 십시일반 모금으로 구한 앨라이들의 이야기, 에이즈 위기 당시 게이들을 위해 헌혈을 조직한 레즈비언의 이야기,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자긍심 깃발 정책에 멋지게 대응한 공직자의 이야기 등. 저는 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위기를 헤쳐 나가고 혐오에 맞서고 차별을 뛰어 넘는 이야기들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불어 넣고 싶었어요. 어때요, 지금까지의 제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나요?
물론 세상에 희망적인 순간만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퀴어도 앨라이도 차별과 혐오에 맞선 많은 사람들도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죠. 굳이 배제와 멸시 때문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많은 것들이 무너지거나 사라지곤 해요. 우리에게 소중하고 값진 것들이 말이에요. 지금 제 상황도 비슷할지 몰라요. 사실 할 수 있다면 저는 재단에서 오래오래 자리를 지키며 이 메일을 통해 그리고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과 여러 채널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요. 저는 밝고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좋거든요. 하지만 현실이 그걸 허락하지 않네요. 그간 여러 고군분투가 있었고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재단의 재정 적자는 정말 현실이 되었어요. 그리고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조직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요.
잠깐,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활동가로서 저도 ‘소중하고 값진 무언가’에 해당하는지 물었어야 했던 걸까요? 하지만 이미 편지가 여기까지 와버렸고 저는 원고를 고쳐 쓸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냥 그런 셈 쳐버려요 우리.
물론 제가 사라진다고 비온뒤무지개재단까지 끝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떠나는 건 어쨌든 재단이 당장 살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포인트는 ‘당장’이에요. 지출을 줄여 지금의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재단이 계속 이 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어요. 재단이 단단한 생존 기반을 마련하고 조직을 재정비해서 더 많은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고정수입 확보가 필수적이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은 재단이 충분한 정기기부자를 확보하는 것이고요. 아마 여기까지 읽으시면 제가 어떤 요청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해요. 어쩌면 ‘또 정기기부 요청이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고요. 하지만 이건 그냥 요청이 아니에요.
제가 이 자리를 떠나기 전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로선 마지막으로 드리는 정기기부 요청이에요.
이런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졌네요. 하지만 작별인사가 어떻게 마냥 밝을 수 있겠어요. 약간의 이해를 구할 게요. 만약 제가 입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문장을 쓰고 있다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요. 왜 웃고 있냐고요? 비록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재단을 떠나지만 저는 여전히 희망을 보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 조직이 사람들의 더 많은 정기기부를 받아 이를 디딤돌로 더 큰 세상에 나가리라는 희망이요. 그리고 더 많은 공익 활동을 하고 퀴어들의 비빌 언덕도 되고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이요. 우리가 지금까지 뉴스레터를 통해 나눈 것과 같은 그 이야기들에 담긴 것과 같은 것이요. 우리를 웃고 낙관하고 힘을 내게 만들었던 이야기 속에 담겼던 것과 같은 것이요.
그리고 제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한가지가 더 있어요. 이 작별은 재단의 미래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제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해요. 저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켰어요.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제 성정을 생각하면 정말 긴 시간이지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저는 제가 너무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어요. 그게 일이든 무엇이든 말이에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죠. 하지만 이제 저는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 부딪히고 모험하고 성장할 기회를 얻었어요. 저는 지금 소풍을 앞둔 사람처럼 웃으며 신발 끈을 매고 있답니다. 눈물지으며 뒤를 보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도 웃으며 저의 앞으로를 응원해주실 거죠?
이제 메일을 마칠 때가 되었어요. 아무래도 쉽진 않네요. 이제 몇 문장 후에 진짜 작별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주저해선 안 돼요. 끝맺음이 없다면 새로운 시작도 없으니까요. 마무리가 있어야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헤어짐에는 멈칫거리는 미련이 없어야 해요. 다음 장, 그건 비온뒤무지개재단에게 지금 당장 너무나 필요하고 절실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이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길 게요.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깊은 사랑을 전합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바랍니다.